“혼자는 심심할 테니까요.”
“…….”
“진심입니다.”
“낮의 일을 추궁하고 싶은 게 아니라요?”
“…제가 책임자도 아닌데 굳이요?”
“…….”
“아직 이곳이 익숙하지도 않은 분께 새벽 내내 불침번을 서게 만든 상황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요.”
요한은 다소 난처한 듯이 그렇게 말했다. 오해받은 사람답지 않게 그는 무해한 낯으로 웃어보였다. 정말로 가까운 친구라도 찾아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우리가 말을 섞어봤자 얼마나 섞어봤다고 혼자 저렇게 친해져버린 거지. 조슈아는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거리감을 보며 속으로만 혀를 찼다.
아무튼 그가 가져다 준 모포는 따뜻했으므로.
몸을 꿈지럭거리며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더니 요한은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밤을 새다 보면 맥주가 마시고 싶지 않나요?”
“이렇게 날씨가 서늘한데 그런 게 생각나십니까?”
“조슈아 경은 그럼 뭐가 좋습니까?”
“…저는, 글쎄요.”
따뜻한 홍차가 마시고 싶었다. 기왕이면 시에스타가 좋았지만, 아발론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품종이었으니 다른 종류라도 상관없었다. 생각하다보니 종종 즐기던 향긋한 홍차 향이 떠오르고 말았다. 너무 뜨거운 물로 우려서 떫은맛이 나는 형편없는 것이라도 상관없을 만큼 차가 간절해졌다. 쓸데없이 이런 걸 생각나게 해서는. 조슈아는 혀를 찼다.
“조슈아 경은, 홍차 맞죠?”
“……네?”
“지금 생각나는 거. 우유를 곁들인 홍차 한 잔.”
말하며 요한은 옆 자리에 내려놓았던 바구니를 달랑달랑 흔들어보였다. 언제 들고 왔는지 모를 바구니에서는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과 머그컵과 찻잎이 나왔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요한이 하는 걸 지켜보니 그는 능숙하게 뜨거운 물을 부어 컵을 데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른 도구들까지 전부 가져오기엔 너무 번거로워서요. 이것저것 많이 빠져서 아쉽긴 하지만,”
“…….”
“참고로 찻잎은 루미에 경의 추천입니다.”
적당히 컵을 손으로 만지기 좋아질 만큼 데워졌을 즈음, 안의 물을 버리고 찻잎을 적당히 넣는 행동이 제법 여러 번 해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홍차를…자주 드십니까?”
조슈아는 차를 우리는 남자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몇 번 대접하다보니 어설프게나마 늘더라고요.”
남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실하고 고지식한 기사님다운 대답이었다. 왕성에서 차를 즐기는 인물이라면 아마 몇 명으로 한정될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 남자에게 연거푸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라면… 역시 자신의 주군이겠지.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조슈아는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에 저도 모르게 어깨의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무릎에 턱을 괴고 맑은 수색이 우러나는 과정을 관찰하는 동안 우습게도 기분이 조금 좋아져버렸다. 긴 밤을 새며 처음으로 몸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무 무료해서 차 한 잔이 간절했는데.”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예측과 직감이랄까.”
수상할 정도로 알맞은 타이밍에 알맞은 물건을 꺼내놓은 남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조슈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었다.
어쨌든 이 새벽에 홍차를 대접해주는 사람이라면 수상쩍긴 해도 귀인으로 분류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향이 좋네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요한은 반색하며 물었다.
“이건 괜찮습니까? 뭘 물어봐도 답을 안 해주시니 도통 취향을 알 수가 없어서….”
“예?”
“으음, 그러니까… 취향에 맞을까 걱정했다는 뜻입니다.”
방금 전에는 몇 번이나 실패한 사람처럼 말한 거 아니었나?
모르는 척 넘어가기에는 실언이었다는 표정이 잠깐이지만 너무 선명하게 스쳐지나갔다. 대체 뭐 하는 수작인 거지. 의구심이 피어올랐지만 이 이상 지체했다가는 수색이 탁해질 것 같아서 조슈아는 추궁 대신에 머그컵을 들었다. 손바닥에 스미는 따스한 기운이 기분 좋았다.
“…모든 기호품이 그렇겠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갈립니다.”
“……네?”
“제가 이걸 괜찮다고 추천했다 해도 다른 사람의 입맛에는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아…. 네 그렇죠.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차를 호로록 마시며 조슈아는 곁눈질로 남자의 기색을 살폈지만, 그는 영 대수롭지 않은 듯 보온병을 잠그고 집기를 도로 바구니에 챙겨 넣을 따름이었다.
“요한 경은, 안 드십니까?”
“네 전 괜찮습니다. 몇 번 마셔봤는데 제 입맛에는 영… 안 맞더라고요.”
아니 그럼 이걸 정말로 나 혼자 마시라고 싸왔다고?
어이가 없어져서 컵을 든 상태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산뜻한 낯짝이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할까봐 차와 담요를 챙겨 와서 말동무를 해주는 기사님이라니. 봉사 활동이 지나쳤다.
아발론에서 지내는 동안 이곳이 놀라울 만큼 자유분방하고 격의 없는 곳이라는 걸 몇 번이나 실감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나 적용되는 일이었다. 그 안에 적군의 사령관이었던 자의 자리는 없었다. 넣어달라고 간절하지 바라지 않았다 해서 밀쳐지는 기분까지 썩 유쾌한 건 아니었다.
그걸 절절하게 실감한 게 바로 오늘이었다면, 이 남자의 행동이 위선처럼 보이는 이유도 반드시 제가 꼬여있기 때문만은 아니지 않을까.
목 끝까지 치미는 싫은 소리를 뱉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건 피로한 일이었다.
…조슈아에게도 그런 울타리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다 부서져 형체도 남지 않았지만, 생과 사의 경계를 밟은 채로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으려 모인 자들을 넣어두었던 울타리였다.
그리고 그걸 소중히 했었다는 걸, 더는 티내서는 안 되는 곳에 그는 지금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조슈아는 작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찬바람과 하얀 성벽과 친절한 남자와 함께하는 지독하게 외로운 밤이었다. 입 안으로 흘러들어온 찻물을 오래 머금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바람소리만큼은 어디에서는 비슷한 법이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막막한 순간이면 습관적으로 하던 버릇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더니 조심스러운 손길이 팔을 당겨왔다. 황급히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기우뚱 넘어가는 중심을 잡은 조슈아는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물음보다는 요한의 휘둥그레 떠진 눈이 먼저 시야에 잡혔다.
“죄송합니다. 저는 잠드신 줄 알고… 피곤하면 기대셔도 되는데….”
“…….”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려던 모양이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요한은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조슈아는 조심스럽게 간격을 벌리며 말했다.
“보초를 서러 와서 잠들면 어떡합니다.”
“제가 깨어있으면 되니까요.”
“요한 경이 왜요.”
“조슈아 경도 딱히 아무 이유 없이 자기 몫이 아닌 업무를 떠안으셨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제가….”
피해를 끼쳤으니까. 라고 말했다가는 아까의 반복일 것 같았다. 그렇군. 자기 말만 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려고 하면 이런 식이 되는 거였군. 조슈아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대답했다.
괜찮지만, 됐습니다.
“그 쪽은 정말 남의 말을 하나도 안 듣네요.”
“……?.”
아니. 망했군.
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마음의 소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새어나와 버렸다.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더니 요한은 둥근 눈동자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네.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원래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편입니다.”
“…….”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겨먹는 걸 잘해요. 조슈아 경도 너무 버티지만 말고 기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잘 지치지 않는 사람이라서.”
선량한 표정과 부드러운 말씨로 자기는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는 소리를 내뱉고 있는 아이러니함이라니. 그에게 어울려주고 싶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오기는 귀찮음에 밀려서 슬슬 사라져갔다. 아무렴 봉사 받는 불우한 이웃의 입장이 되는 건 사실 별 것도 아니지 않을까 싶어지는 밤이었다. 조슈아는 벽에 머리를 가볍게 기댄 채로 발을 쭉 뻗었다.
“소리는 그래도 듣고 있으니까, 눈만 조금 감겠습니다.”
“네, 얼마든지. 말했듯이 어깨도 빌려드릴 수 있어요.”
요한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친절만큼 웃음도 헤픈 남자였다. 이렇게 아무나 붙잡아다가 친절을 베푸는 인간은 아마 만족할 만큼 간섭한 뒤에는 스스로 떨어져나갈 것이다. 마르지 않는 타인의 지갑을 주운 기분이었다. 어차피 잠시라면, 주인 없는 지갑의 돈을 제가 조금 누린다고 해도 큰일은 나지 않는 게 아닐까.
이게 중첩된 피로로 인한 자기합리화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조슈아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남자가 가져다 준 모포는 따뜻했고, 홍차의 향은 기분이 좋았고, 오래 혹사당한 눈은 시큰거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