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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열대야도 기세가 한풀 꺾여 밤이 되면 슬슬 겉옷이 필요해지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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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는 얇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몸을 조금 더 구기며 하품을 했다. 여름이 끝났다는 걸 알리려는 듯 일교차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었을 텐데. 밤 기온을 우습게 본 탓에 다소 썰렁했지만 굳이 이 높은 종탑을 다시 내려가서 모포를 몇 개 더 들고 그 긴 계단을 다시 오를 의욕은 생기지 않았다. 그는 맨 처음 종탑을 오르는 순간부터 이미 이 끔찍하게 긴 계단을 도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충분히 절망했다. 두 번의 왕복은 그의 인생에 없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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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수 없지. 조슈아는 결핍을 채우지 않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가벼운 추위 정도는 견디기 대단히 힘들지 않은 편이었다. 몇 시간만 더 버티면 곧 교대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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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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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탑 위에서 내려다 본 하얀 왕성의 내벽은 고요하고 수수해서 정말 더럽게 시간이 흐르질 않는 기분을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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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깃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조슈아는 허술하게 만들어진 난간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무게를 싣자 끼이익 녹슨 목재의 소리가 났다. 높이 때문에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긴 했지만 왕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공간이라 보초를 서기에는 제법 알맞은 곳이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벽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슈아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누군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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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대라기엔 그래도 시간이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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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척을 숨기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전달사항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만 혹시 모를 침입자의 가능성도 열어 둔 채로 조슈아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야가 차단되니 청각이 한 층 더 예민해졌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곳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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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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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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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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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손에는 모포가 두 장 들려 있었다. 조슈아는 낯선 방문자의 차림이 현재 시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가 저물고 일과가 끝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훈련을 할 때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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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평소에 얼마나 자율 훈련에 중독된 사람인지는 조슈아 역시 알음알음 들은 바가 있었지만, 설마 보초를 서는 종탑을 오르내리는 취미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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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보초를 조슈아 경이 서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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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성큼 다가와 들고 있던 모포를 펼쳤다. 조슈아가 걸치고 있던 것보다는 확실히 방한효과가 좋을 것 같은 두툼한 두께였다. 꼼꼼하게 머리와 어깨를 감싸서 매듭을 지어주는 요한의 표정은 진지했다. 등과 팔이 두꺼운 직물로 한 겹 둘러싸이자 한결 썰렁함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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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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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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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것 같아서…. 요한 경은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전달사항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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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가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요한은 남은 모포를 긴 방향으로 두어 번 접어 바닥에 깔고서 손짓했다. 위에 앉으라는 뜻 같았다. 멀뚱하니 서있는 조슈아의 팔을 붙잡아 직접 모포 위에 앉히며 요한은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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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옆에 있으려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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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며 그는 조슈아의 옆 자리에 앉았다. 스스럼없는 모습이 어쩐지 거북해서 조슈아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무슨 친한 척이지. 마치 친밀한 동료라도 된 것처럼 구는 남자의 의중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란히 멀뚱하게 앉아서 침묵을 견뎌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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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없이 잠시 앉아있던 요한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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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 도중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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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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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그렇지. 조용한 곳에서 추궁이 하고 싶었던 건가.

 조슈아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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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뭐…. 들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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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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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처럼 치르는 모의전투라기에 초능력을 썼는데 아무래도 저만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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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한 출력을 조절해서 지형지물을 조금 부쉈을 뿐인데 부상자가 나왔다. 다행히 능력을 정면으로 맞은 건 아니었고 갈라지는 바닥에 놀라서 넘어졌다는 모양이었다. 만약 이 전투가 진짜였다면 바로 황천길로 직행할만한 실책이었지만, 정작 따가운 눈총은 조슈아가 받았다. 명분은 병사들의 능력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대응이 과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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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를 배척하는 건 본능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 심어진 거부감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제국의 앞잡이라고 부르던 이를 갑작스럽게 자신의 소속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퍽 어려운 것이다. 적으로 만났던 학살자를 갑작스럽게 같은 편으로 두게 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괴리감이었다. 자신들의 수뇌가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경험을 통해 심어진 인식은 의식적으로 고치기 어려운 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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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때문에 발을 다쳤다는 모양이니, 보초나 대신 서주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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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었는데요. 훈련 중에 부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밤새 보초를 서는 건 기사의 업무가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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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가. 기사 서임을 받은 자들은 이런 변변치 않은 일은 하지 않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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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자신의 일과표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임무였다 싶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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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대강 머리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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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책임질 수 있는 방도가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부러진 발목으로 저 계단을 오르라고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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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탑의 빈 중앙을 타고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은 아마도 부목을 댄 상태로 오르기엔 지나치게 길었을 것이다. 조슈아가 만약 기사단에서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들끼리 알아서 순번을 조정해주겠지만, 뚝 떨어진 섬처럼 고립되어 힘도 권력도 없는 인간에겐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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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수 있나. 몸으로나마 때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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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에게는 이 모든 걸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어차피 자신이 아발론에서 얼마나 좁디좁은 입지를 가졌는지 굳이 이해시켜서 대단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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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숨을 삼키며 조슈아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밤하늘에 빼곡한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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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 경. 일부러 누군가를 다치게 만든 게 아니라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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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혹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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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감을 느껴서 보초를 대신 서주시는 거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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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 두 가지가 동일한 감정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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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왜, 모른 척 해도 됐을 일을 굳이 책임지러 나선 겁니까? 조슈아 경도 고작 병사 한명의 사정을 배려해주지 않았다는 점이 책잡힐만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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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의 얼굴은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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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녀석은 아발론에 있는 모두가 자신처럼 머리에 꽃을 달고 착하고 바른 마음가짐만을 품은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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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 없었던 요한에게 훈련 도중 일어난 사건을 브리핑 해준 사람이 그 순간의 분위기까지 말해주진 않은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거기 있던 모두가 자신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었다는 걸 말해봤자 이 남자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대신 가장 무난한 말을 늘어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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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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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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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골적으로 성의 없는 대꾸였지만 요한은 무시당했다고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캐내려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조슈아의 얼굴을 뜯어볼 따름이었다. 얼굴이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을 잠자코 견뎌내며 조슈아는 몸을 웅크렸다. 이 자는 대체 무엇을 알고 싶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는 걸까. 혼자 있을 때의 고요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공기가 그리워질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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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는 결국 항복 선언처럼 왼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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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력을 줄인다고 줄인 겁니다. 사람을 향해서 조준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저를 모의 전투에 참여시킨 것 자체가 초능력전을 경험시키면서 대비하고 싶었던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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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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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도 오늘 처음 본 인간입니다. 원한 같은 걸 만들기엔 접점도 뭣도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무차별테러를 일으키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걸 믿으신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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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뇨, 아닙니다.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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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조슈아의 말을 급하게 자르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서둘러 대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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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가 있었나본데… 고의성이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아까부터 줄곧 ‘일부러 한 일이 아니라면’이라고 말했는데 왜 그런 오해를 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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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변명은 요한의 대답에 순식간에 효용을 잃었다. 이번에야말로 이쪽도 열이 받았기에 조슈아는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손바닥으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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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대체 무슨 소리가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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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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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해 죽겠다고요.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하십시오. 떠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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