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경의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
“제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루인 경이 시계를 두고 오셨다기에 잠시 빌려드렸던 겁니다.”
“접견실에 있던 걸 집어왔는데, 설마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네요. 늦었지만 돌려드릴까요?”
순순히 인정하는 요한의 말에 조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줄곧 긴장된 상태로 몸을 움츠리고 있었기에 뒷목이 당겼다. 두통의 전조증상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돌려받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본래부터 시간을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죠.”
“…….”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시계를 굳이 종탑까지 들고 올라왔다니…. ‘그래야 하기’ 때문에 몸에 익지 않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요한은 종탑에 올라왔을 때부터 줄곧 수상쩍었다. 그가 눈에 익은 시계를 꺼내들어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이 위에서 시간을 체크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구나. 평소에는 시계 따위를 들고 다니는 걸 본 적도 없었다.
“…요한 경. 말하기 싫은 걸 억지로 캐낼 만큼 저는 기력이 넘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당장 침대위로 쓰러지고 싶을 만큼 지쳤고요….”
“…….”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서 저를 방어할 거지만…. 하… 모르겠네요. 당신이 저를 감옥에 처넣고 싶은 거라면 지금 말하세요. 혹시 압니까. 제가 다 피곤해진 나머지 협력해줄지.”
조슈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뒷목을 문질렀다. 저출력의 초능력이었다 해도 오랜만에 사용했기 때문인지 부하가 쌓인 기분이었다. 밤에 이런 테러 사건에 휘말린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낮에 그런 무리를 하지 않았을 텐데.
한참이나 대답을 미루던 요한이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기절한 남자를 타넘어 한 걸음 저에게 가까워진 요한은 무표정한 낯으로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멍하게 남자의 동공을 들여다보던 조슈아는 어쩐지… 그의 등 뒤로 지워지지 않는 피로의 그림자가 얹혀져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에게도 충분히 고단한 하루였지만, 왠지 몰라도 그것과는 결이 다른 것 같은….
멍청한 생각과 함께 손이 천천히 뻗어졌고, 조슈아는 남자의 머리를 감싸 안고서 등을 내리 눌렀다.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머리보다는 손이 더 빨랐다.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가 요한의 머리를 끌어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사방의 돌벽이 무너져 내렸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그저 완성품을 부수는 신의 손길처럼 무참하게.
우르릉,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사람 머리만 한 벽돌들이 두 사람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폭발은 아니었다. 불꽃도 폭음도 없는 단순한 무너짐이었다. 마치 누군가 이음매를 해체한 것처럼 장벽이 와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조슈아는 염력으로 몸 주위를 감쌌다.
한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벽은 도미노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지하 수도의 통로 한 면 전체가 무너져 내려왔다. 머리 위를 누르는 무게감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거워졌다. 몸의 휘청거림을 막을 수가 없었다.
“허윽…!”
지진이나 땅울림도 없이 이렇게 지하수도가 무너져버린다니.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에 눌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치를 떨며 조슈아는 온 힘을 집중해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넓게 능력을 둘렀다.
그래봐야 간신히 두 사람이 꼭 들어맞을 크기의 공간이었지만.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공간의 주변 벽돌을 염력으로 들어 올리고 있는 와중에도 느껴지는 하중이 점점 커졌다. 아차 싶은 순간, 부지불식간에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머릿속에서 끊임없는 스파크가 튀었다.
가까스로 만들어낸 보호막에 등을 기대고 양 팔을 뻗어 바닥을 지탱하자 밑에 깔려있던 요한이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이런 엔딩인가보네요.”
“……뭐?”
사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통에 조슈아는 제대로 남자가 하는 말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말초신경부터 하나하나 순서대로 터져나가는 것 같은 압력이었다. 안구의 실핏줄이 터졌는지 눈앞이 뿌옇고 빨갰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죽음이지. 요한의 검에 심장이 꿰뚫렸어도 이것보다는 더 납득 가능한 죽음일 것 같았다. 폭약도 안 터졌는데 왜 지하 수도가 무너진단 말인가. 이게 무슨 개죽음….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수많은 욕설들 사이로 너무 무겁다, 는 생각이 점점 더 비중을 키워가고 있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넓은 범위로 염력을 펼치는 건 지속시간이 길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 돌무덤 사이로 길을 내야 하는데….
“크흣!”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포기해도 돼요. 조슈아 경.”
밑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듣는 순간 머리의 퓨즈가 부글부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닥치세요…. 위는 무리지만 아래로 길을 뚫겠습니다. 배수로까지만 연결시킬 수 있다면….”
“아뇨. 우린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이…,빌어먹을….”
제가 지금 이 상태로 말을 길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압니까.
남자의 차분한 음성에 진저리가 났다. 당장 입을 다물지 않으면 영원히 다물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핏줄이 불거지는 와중에 요한은 천천히 손을 뻗어 조슈아의 뒷목을 감싸 당겼다.
“…죽을,”
“정확하게 말하면 제가 못 벗어납니다.”
“…….”
빌어먹을. 조슈아는 지금 이 자가 여기서 무슨 허튼 소리를 해도 그걸 제대로 판별해 낼 자신이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세포가 오로지 염동력을 사용하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에 집중해 줄 수가 없는 이 상황에… 찬물을 뿌리는 것 같은 충격적인 서두였다. 눈을 굴려 남자를 내려다보자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했죠? 저는 지금… 반복되는 하루에 갇혀 있어요, 조슈아 경. 우리가 오늘 새벽을 함께 보내는 건 처음이 아닙니다.”
“…….”
힘이 풀려서 팔이 무너지자, 저도 모르게 요한에게 풀썩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머리 위로 벽돌이 한차례 우르릉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염력의 가동 범위가 줄어든 것이다.
조슈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너무 애쓰지 마요. 요한은 속삭이며 차분히 조슈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니까.”
“…….”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그만 뒀어요. 우리는 영원히 16일에 갇혀있는데… 계기는 죽음이에요. 정말 다채로운 방법으로 무수히 많이 죽었고, 눈을 뜨면 다시 16일 자정. 끝나지 않는 굴레를 걷고 있는 기분이에요.”
“…….”
“들킨 건 이번이 처음인데… 조슈아 경도 시간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점점 날카로워지는 모양이네요.”
“당신이… 쓸데없는 티를 내니까….”
“하하. 그렇지만 계속 반복되기만 하는 하루는 정말 너무 지루해서… 당신도 겪어보면 이해할지도 몰라요. 어떻게든 새롭게 보내고 싶어지는데…. 이번에는 과연 그 자가 당신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들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요….”
안 믿는 거 알아요. 저도 같은 말을 들으면 안 믿을 테니까.
요한은 느릿하게 설명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압력이 몰려서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이제 해마를 파괴하는 수준으로 사납게 일렁이고 있었다. 과연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란 건 단어 그대로 심상치가 않았다. 조슈아는 어떻게든 애를 써서 요한을 눈에 담으려 했다. 남자는 실핏줄이 다 터진 눈을 감겨주며 속삭였다.
근데요 조슈아 경. 더는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발버둥 쳐도 죽어버리는데… 계속 하루가 반복되어 버리는데… 나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처음에는 살기 위해서 노력도 해봤지만, 잘 안 됐어요. 영원히 내 발치를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도무지 죽음이 떼어지지가 않아요.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아요. 현실감이 점점 흐려지고… 여기서 뭘 더 해야 끝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오로지 그 생각만 해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죽고 싶다고. 이대로 잠들어서 영원히 깨지 않고 싶어요. ……그렇지만 역시 이번엔 안 되겠죠. 하하…. 당신도 같이 죽어버릴 테니까. …다음 번엔 안 그럴게요. 얌전히 조슈아 경을 구하도록 노력해볼게요. 하지만 그건 진심이에요. 종탑에는 정말로 당신을 만나러 간 겁니다. 16일의 조슈아 경은 아마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정말로 진심.
남자가 밑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거의 절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세포 단위로 몸이 죽어가고 있다고 착각이 들만큼 끔찍한 격통이었다. 조슈아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선 죄다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 요한의 얼굴을 쥐었다.
“…그런 얘기는, …더 빨리,했어야죠…이,미친,자식아.”
죽기 전에 이 말만은 꼭 해야 될 것 같아서.
요한의 음성이 난처한 듯이 흔들렸다.
“…음, 그치만 안 믿는다니까요. 당신이.”
사람은 정말 쉽게 죽으면서 의외로 쉽게는 죽지 않았다.
죽음까지 필요한 고통의 치사량이 이 정도라면 정말 두 번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없는 기력을 짜내서 공간을 조금 벌렸다. 요한의 삶이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도 더 이어지도록.
“더 버티지 마요. 어차피 다시 시작이에요.”
요한은 조슈아를 토닥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극한에 몰려있기 때문인지 판단력이 마비된 것 같았다. 조슈아는 스스로가 과연 어떠한 비현실적인 현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증거가 있어야 납득하는 인간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가 지금 죽음 앞에서 이렇게까지 초연한 건 역시나…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너는 몇 번 죽었을까. 과연 이런 고통을 몇 번이나 기억할까. 이런 끔찍한 기분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채로 평범하게 다시 눈을 뜨는 건 어떤 느낌일까.
“…조슈아 경이 있어서 이번 죽음은 조금 덜 외롭네.”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나쁜 자식.
조슈아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요한에게 속삭였다.
“찾아와…. 눈 뜨면 다시 나한테 찾아와. 알겠어?”
“…….”
“그리고 공손하게 부탁해. …살려달라고.”
하하. 요한이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과연 제정신이 아닌 사람다웠다.
“살려줄 거예요?”
“…최소한 하나보단 둘이 낫겠지.”
“…….”
“와서 말해요. 오늘의 내가 알려줬다고.”
요한의 귓가에 말을 속삭이는 동시에, 등 뒤로 쳐진 방어벽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고 시야에는 어둠뿐이었다. 무엇이 묻혔는지도 알 수 없는 거대한 돌무덤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